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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누구를 찾느냐 (요한 20:11-18)

관리자 2010.04.22 20:26 조회 수 : 4815

(아래내용은 주일설교 내용이 아님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한 두 제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11절 말씀을 보세요.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드리는 것으로 예수님을 잃은 슬픈 마음을 달래려 했는데,
예수님의 시신마저 없어지자 슬픔이 복받쳐 도저히 무덤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덤 밖에서 서서 울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무덤 속을 가끔 구푸려 들여다보며 계속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세요.
그런데 마리아가 울면서 무덤 속을 또 들여다보았을 때,
놀랍게도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을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3절 말씀을 보면,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무척 놀라운 상황이었지만,
슬픔에 빠져있던 마리아는 천사들을 보고도 놀라기보다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며 계속 울 뿐이었습니다.

14절 말씀을 읽어 보세요.
그리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께서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슬픔 때문에 영적 눈이 감긴 마리아는 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마리아가 왜 이렇게 슬퍼하는 것일까요?
마리아는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정말 사랑했습니다.
과거 그녀는 일곱 귀신 들려 비참한 인생을 살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고, 변하여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 말씀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서
당시 여자들의 결혼 지참금이었던 향유가 담긴 옥합을 예수님께 들고 와서는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의 긴 머리털로 그 발을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마리아는 자신의 소중한 향유 담긴 옥합, 즉 결혼의 꿈마저도
모두 예수님께 바칠 만큼, 예수님을 참 사랑하고 예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하며 좇던 예수님께서
어느 날 너무도 무력하고, 너무도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사실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심정이 얼마나 무너지듯 아팠을까요?
마리아는 예수님만 생각하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신에 향유라도 발라드리므로 마음을 달래고자 했는데,
예수님의 시신마저 사라지자 마리아는 복받치는 슬픔으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마리아의 이 슬픔은 예수님을 잃은 데서 오는 슬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마리아의 슬픔은 죽음에 대한 슬픔입니다.
결국 마리아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이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슬픔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죽음 때문입니다.
죽음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각 사람들에게 역사하여 나타납니다.
본문 속의 마리아에게는 죽음이 슬픔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으로 나타나고 있지요.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허무의 모습으로, 무의미, 무기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죽음이 냉소적인 모습으로, 매사에 부정적인 태도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쾌락으로도 나타납니다.
죽으면 끝인데 하는 생각에 인생을 쾌락으로 낭비하고, 즐기려고만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각 사람에게 독소처럼 역사하여,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그 사람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결국 마리아도 그 내면 깊이 뿌리박힌 이 죽음 문제를 해결함 받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야지만, 그 눈에서 눈물이 사라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부활 신앙이 없으면,
마리아처럼 이렇게 슬픈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감사해서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좇고는 있지만,
마음속에 부활하신 영광의 예수님의 모습보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슬픈 예수님의 모습만 더 크게 부각되어 있다면,
그 신앙은 자연히 한계적이고 슬픈 신앙생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충성스럽게 교회역사를 섬기지만,
왠지 얼굴은 늘 우수에 차 있고,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 듯한
그런 모습을 하고 다닙니다.
이런 분들은 something wrong! 뭔가 문제가 있는 신앙이지요.^^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의 신앙생활은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슬픔으로 앞이 가리워진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그 음성을 깨닫지도 못한 채,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하고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거든 어디로 옮겼는지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16절 말씀을 읽어 보세요.
“마리아야!”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마리아야!”
평상시 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시던 그 음성, 그대로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마리아의 감겼던 눈이 떠졌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랍오니여!” 감격에 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붙들고자 했습니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자신의 눈앞에 떡 하고 나타나시자
마리아는 너무 기뻐 이 예수님을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17절 말씀을 보면,
‘아직 하나님께로 올라가시지 않으셨다’ 말씀하시며 만지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대신 제자들에게로 가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27절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예수님을 만져볼 것을 허락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를 볼 때, 아마도 예수님은 마리아가 부활의 예수님을 생전의 예수님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즉 랍비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으로서 예수님과 새로운 인격적 관계성을 맺고자 이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인격적으로 나타나심으로
그녀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으시고, 내면의 모든 슬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녀의 눈에서 어느새 눈물이 사라지고, 한숨이 사라지고 부활의 기쁨으로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에게 새 사명을 주십니다.
1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제자들의 아버지요,
예수님의 하나님이 곧 제자들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친히 형제 삼으시고, 우리 신자들의 맏형이 되셔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똑같이 부활할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이 부활의 믿음은 과거의 한 사실에 대한 믿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이루어질 미래에 대한 기대만도 아닙니다.
부활의 믿음은 지금 바로, 현재에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현재 내 속에 살아계셔서 나를 강권하시고,
부활의 믿음으로 현재의 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이 현재 내 삶 속에 살아 역사할 때만이
나의 삶은 더 이상 한계에 굴복하지 않고, 죽음의 권세에 시달리지 않으며,
현재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부활의 믿음은 마리아와 같이 인격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음성을 불러주신 그 예수님께서 지금도 나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심령으로부터 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인격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누구보다도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때,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외친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세요.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제자들에게로 달려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우리 내면에서 모든 슬픔과 운명과 어두움, 무의미, 무기력, 허무 등 죽음의 그림자를 다 사라지게 합니다.
부활의 소식은 우리를 180도 변하여 놀라운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게 만듭니다.

새싹이 움트는 이 봄, 부활의 기쁨이 우리 심령에 충만키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능력 있고 한계를 극복하는 삶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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